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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의미의 경복궁

by heeee8723 2025. 5. 3.

경복궁의 변천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도성의 대표적인 궁궐입니다. 1395년에 처음 건설되었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가 조선 말기 고종 때 중건되어 잠시 궁궐로 이용되었습니다. 이성계가 왕이 되어 곧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습니다. 종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 3대 태종 때 또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태종은 궁내에 경회루를 다시 지었는데, 연못을 넓게 파고 장대한 누각을 지어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편에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습니다.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 두었으며 경회루 남쪽에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을 세우고 궁 서북 모퉁이에 천문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하였습니다. 강녕전 서쪽에는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습니다. 1553년에는 궁 내에 불이 났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습니다. 이듬해에 강녕전 외에 교태전과 연생전, 흠경각, 사정전을 복구하였습니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궁은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궁의 복구 문제는 왜란 직후부터 논의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습니다. 궁의 중건이 완료된 것은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의 일입니다. 수렴청정 중인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강력한 의지로 여느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 규모는 7,225칸 반이며 후원에 지어진 전각은 융문당을 포함하여 256칸이고 궁성 담장의 길이는 1,765칸 이었습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이때 조선왕조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인하여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왕은 거처하는 곳을 옮긴지 27년째인 4896년에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습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 안의 전, 당, 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 민간에 방매하고 1917년 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 강녕전, 동행각, 서행각, 연길당, 경성전, 연생전, 인지당, 흠경각, 함원전, 만경전, 흥복전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 희정당 등을 지었습니다. 궁전 안에는 겨우 근정전과 사정전, 수정전, 천추전, 집옥재, 경회루 등과 근정문, 홍례문, 신무문, 동십자각 등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하였습니다. 또한 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 정면 앞에 매우 큰 석조 건물인 총독부 청사를 지어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버렸습니다. 이 밖에도 자선당 자리에도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건청궁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궁은 공원으로 개방되는 한편 일본인들이 지었던 총독부 청사는 정부종합청서로 활용되다가 1971년에 궁의 동북 담장 가까이에 지어진 목조기와건물 모양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들어있던 국립박물관이 1986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을 고치면서 이 건물로 이건되었습니다. 옛 총독부청사는 1995년 8.15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철거되었으며 이 자리에 원래 있던 흥례문 권역이 2001년 10월에 복원되었습니다. 한편, 일제에 의해 건물이 부서지고 철거되는 피해를 입은 경복궁을 복원하는 공사가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약 40%가 복원되고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졌던 광화묵 역시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경복궁의 위엄

경복궁이 자리 잡고있는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주산의 바로 아래입니다. 궁의 전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전개되고 그 앞에는 남산이 있으며, 내수인 천계천과 외수인 한강이 흐르는 명당의 터 입니다. 궁의 왼쪽으로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인 좌묘우사를 따른 것입니다. 고종 때 중건된 궁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방향(Length)으로 되어 있으며, 궁성의 둘레는 1만 여척으로 시가지를 내려다 보듯이 남쪽으로 향하였고 궁의 주요건물들도 모두 남향으로 되어 있습니다. 건물의 배치는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는 정전과 편전들이 놓여있고, 뒷부분에는 침전과 후원이 자리 잡고 있어 이른바 전조후침의 격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이 정전과 침전을 좌우에 놓거나 배치에 있어 앞뒤의 관계가 불분명한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경복궁이 조선조의 정궁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경복궁은 비록 궁 내의 건물들 대부분이 없어져서 근정전과 경회루를 제외하고 많은 전각들이 복원되었지만, 창건 때의 위치를 지키고 있어 조선왕조 정궁의 면모를 대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