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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이고 환상적인 바로크, 로코코 건축의 기원

by heeee8723 2025. 4. 16.

바로크양식이란?

바로크 양식은 르네상스 말기인 17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여 17~18세기에 걸쳐 유럽 전역으로 발전하였던 건축양식입니다. 지성과 이성에 호소하였던 르네상스 양식에서 벗어나 극적이고 환상적인 효과를 추구하였습니다. 바로크(Baroque) 용어는 '괴상한 진주'라는 뜻을 가진 포르투갈의 바로코(Baroco)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있고, 과도하게 사용된 장식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바로크 양식에 대한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바로크 예술은 과도한 장식과 표현을 대표하는 대명사로 사용되었지만 바로크 양식의 근원은 르네상스 양식에 기인합니다. 16세기 성숙기 르네상스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왜곡과 과장이 형식화된 매너리즘 양식이 출현하였고 매너리즘은 이후 소용돌이치는 듯한 화려한 곡선의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으로 발전되었습니다. 바로크 건축이 유행하게 된 원동력은 로마 가톨릭의 부패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운동입니다. 당시 가톨릭의 부패는 교회 내부의 깊은 반성을 불러오고 교회개혁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교회는 영적세계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건축이나 그림, 조각들이 총 망라된 디자인으로 방문객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을 개종시킬 수 있는 교회 건물을 세워 가톨릭으로 끌어들이려 하였습니다. 곡선의 벽면과 천장, 강한 빛의 효과 등은 극적인 효과를 창출하였고 이러한 극적인 효과는 논리와 이성에 호소한 르네상스 예술과 건축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입니다. 바로크는 감성적이고 심미적인 건축이고 르네상스가 강요하였던 엄격한 미학적인 법칙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코코양식이란?

바로크 건축에 이어 18세기에 발전된 건축양식이 로코코 양식입니다.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독일, 영국 등 유럽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로코코는 프랑스어의 로카이유(Rocailee)에서 유래된 것으로 로카이유란 원래 정원이나 동굴 등에 있는 바위 형태의 장식을 뜻합니다. 절대군주였던 루이 14세기말 프랑스의 귀족들은 의식적이고 장엄하며 거추장스러운 공적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아담하고 조용한 사적생활을 열망하였습니다. 개인의 친교 등이 이 당시 사회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배경으로 공적생활 위주로 발전하였던 바로크 건축과는 달리 로코코 건축은 보다 섬세하고 우아하며 개인생활에 쾌락을 주는 개인 위주의 소규모 공간과 화려한 실내장식을 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로코코 양식은 지나치게 치장을 하여 매우 호사스러운 방식으로 만개하다가 신고전주의에 밀려 끝을 맞았습니다. 

바로크, 로코코 건축의 특징

바로크 양식은 기하학적인 형태들에 의해 구성된 공간을 연상하게 합니다. 완전한 균형보다는 유동적인 리듬을, 형태의 순수성보다는 자유분방함을 추구하였고 타원, 불규칙성이 애용되고 드라마틱한 명암의 효과를 추구하였습니다. 몰딩에는 강한 음영이 생기게 하고 장식적인 조각이 과다하게 사용될 뿐만 아니라 점점 화려해졌습니다. 로코코 양식은 종교와 절대왕권을 배경으로 공적생활 위주로 전개된 바로크 양식과는 달리 개인의 사적생활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건축형태가 장엄하거나 규칙적인 것을 거부하고 섬세하고 우아하며 개인 위주의 소규모 공간 창조에 열중하였습니다. 실내를 곡선과 곡면을 이용하여 우아하고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 모든 돌출부의 몰딩은 가늘고 약하며 조각은 엷고 평탄하였습니다. 

프랑스의 바로크 건축

17~18세기 프랑스는 유럽의 최강국으로서 문학, 음악, 회화, 건축 등 모든 예술 분야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배출되면서 유럽의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탈리아로부터 바로크 양식이 도입될 당시의 프랑스는 절대왕정체제였습니다. 프랑스의 바로크 양식은 루이 13세때 도입되어 절대군주였던 루이 14세와 그의 귀족을 위해 발전하였고,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탈리아의 바로크는 종교적 열정을 바탕으로 교회 건축 위주로 전개된 반면 프랑스의 바로크는 절대 권력자에 의해 통치되는 중앙집권적 절대주의 양식으로 웅장한 규모와 풍부함이 특징이었습니다. 프랑스 바로크의 대표적 건축가인 프랑소와 만사르는 프랑스 건축이 로마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프랑스 파리 근교 베르사유에 위치한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 때부터 루이 16세 때인 프랑스 혁명까지 프랑스 왕들의 관저로 쓰였던 유럽 궁전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3세가 사냥하기 위해 세운 작은 오두막을 절대왕정시대의 절대 권력자 루이 14세가 가장 웅대하고 화려하게 지은 것입니다. 약 2만 명이 넘는 인력이 무려 50년 넘게 투입된 대규모 공사였습니다. 프랑스 바로크식 정원의 대표적인 예를 보여주는 베르사유는 대칭형과 기하학적인 형태로 권력의 기하학을 장엄하게 표현한 것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중앙 건물로 넓은 길이 이어지고 3개의 뜰과 함께 3개의 날개를 갖춘 대칭형으로 계획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동쪽의 파리로 통하는 대도로를 중심축으로 하여 방사선상으로 2개의 도로가 배치되었습니다. 건물 뒤에는 인공 수로와 테라스, 분수들이 화려하게 설치되어 있고, 베르사유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방은 '거울의 방'입니다. 대리석과 바로크 장식, 금박가루로 마감한 벽면 장식, 천장에서 길게 늘어져 매달려 있는 17개의 거울에서 발하는 광채로 충만한 거울의 방은 이후 유럽의 호사스러운 방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의 절대 권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었습니다. 이 궁전과 정원은 그 아름다움과 웅대함으로 유럽 왕실 궁전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로코코 건축

루이 15세 시대에 들어와서 프랑스귀족들은 기하학적 질서를 벗어버리고 조개껍질의 곡면을 미적으로 표현한 자유로운 로코코 양식을 실내에 적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로코코는 회반죽으로 조개 무늬를 만들어 사용한 프랑스식 로카이유(rocaille)에서 파생된 단어로 벽에 가지 장식을 덧붙여 내부를 치장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늘어진 가지와 잎, 꽃, 포도나 덩굴 등이 스터코로 만들어져 금 도금되거나 채색되었습니다. 이런 로코코는 18세기 초에 파리에서 처음 시작되어 18세기 중반까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로코코는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루이 14세가 죽은 후,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유희적이지만 동시에 우아하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에 즐겨 사용되었습니다. 귀족계급의 주거환경을 장식하기 위해 에로틱한 주제나 아늑함과 감미로움이 추구되었고, 개인의 감성적 체험을 표출하는 실내 장식이나 소품 위주로 제작되었습니다. 로코코는 왕실보다는 귀족들의 사교적 취향으로 많이 애용되었습니다. 파리에 세워져 현재 국림 기록보관소로 사용 중인 소비스 호텔의 내부는 프랑스 대표 로코코 건축가 보프랑의 대표작입니다. 내부의 프린세스 살롱은 큰 창과 거울에 부착된 조각, 도금한 회반죽으로 사치스럽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로코코는 바로크나 르네상스처럼 한 시대를 대표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유는 로코코는 파리를 중심으로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 정도에서 환영을 받았을 뿐 이외의 지역에서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고 이 시기에는 로코코와 바로크뿐만 아니라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등 다양한 예술 양식이 존재하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